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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

이상한 신세계: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Carl Trueman2022-10-22

교회는 절망의 유혹과 낙관의 유혹을 피함으로써 이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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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이 변했다. 자아성(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도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도덕적 양식에 따르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세계의 광범위한 신념에 동의하지 않아도 전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존경받을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어도 저물어 가는 중이다. 기독교가 형성한 사회적 상상의 마지막 자취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심지어 지금 이상한 신세계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처지다. 


자아성 혁명은 구체적으로 성혁명의 다양한 국면에 나타나듯이 유치원 교육부터 직장 내 대명서 사용 정책[직장 내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대명사를 사용할지 말지 같은 정책]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삶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하자면 아직은 이런 일을 피하면서 당분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 현대적 자아성의 관념이 만들어 낸 도전적 상황과 마주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 순응하라는 압력에 직면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시급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세계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 여섯 가지 대응 방안이 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 주_ 이 글은 칼 트루먼,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의 제9장을 부흥사개혁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으로, TGC의 “6 Ways Christians Can Respond to Our Strange New World”를 참고하여 편집하였다. “신좌파 성혁명과 LGBTQ+운동이 만든 이상한 신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여섯 가지 방안을 6회에 걸쳐서 싣는다. 


1. 이 시대에 우리도 가담했음을 인식하자

2. 고대 교회에서 배우자

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치자

4. 성경적 예배를 통해 직관을 형성하자

5. 자연법과 몸의 신학을 회복하자

6. 현실적 소망 안에서 살아가자

절망해서도 낙관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절망의 유혹과 낙관의 유혹을 피함으로써 이 시대에 대응해야 한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므로 교회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낙관에 사로잡히는 것은 단지 나중에 더 큰 절망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절망과 낙관은 모두 무기력을 조장하는데, 이 무기력은 절망의 경우에 무력감에서 비롯되고 낙관의 경우에 순진함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대안이 존재한다. 언론인이자 정교회 신자인 내 친구 로드 드레허(Rod Dreher)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그가 쓴 글의 많은 부분에 나타나는 암울한 전망에 대해 논평했고 그에게 비관적이라고 지적했다. 드레허는 웃으면서 이 표현에 반대했다. 드레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관론자도 아니고 낙관론자도 아니야. 나는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이지.” 그런데 소망은 물론 낙관이 아니다. 폴리애나(Pollyanna[앨리노 포터가 쓴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으로, 이 이름은 낙천주의자를 뜻하는 보통 명사로도 쓰임])도 미코버(Micawber[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낙천주의자])처럼 낙관론자였다. 낙관론은 모두가 단지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신념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소망은 현실적이다. 소망은 이 세계가 눈물의 골짜기며 여기서는 상황이 당위적이지 않으며,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말대로 죽음이 참으로 모든 생명을 끝장낸다고 이해한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인의 본향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 세계가 우리에게 가정의 안락함을 제공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좋은 것에 대해 감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내가 가령 중국보다 더 큰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아직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내가 훌륭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와 장소에 살고 있고, 내가 즐기는 일이 있으며 나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이런 것들이 나에게 계속되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나는 또한 세계가 타락했으며 복음이 내가 현재 누리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반드시 나에게 약속하는 것은 아니며, 나의 소명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처럼 내가 처한 시대와 장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계에서 일이 잘못될 때, 또는 나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회 전체에 고통을 주는 변화와 맞닥뜨릴 때, 내가 절망하지 않고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또한 내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의미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여기서 겪는 고난은 때로 끔찍하고 심지어 참기 어려운 것일 수 있으나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 고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새롭고 혼란스럽고 유례가 없는 암흑기로 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준비해야 하고 교훈을 받아야 하고 자신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믿는지를 알아야 하며, 우리를 지적으로나 직관적으로 진정한 제자와 순례자로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고 확증하신 변함없는 약속에 계속 주목해야 한다. 지금은 소망 없이 절망할 때도 아니고 순진하게 낙관할 때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선택한 독특한 방식으로 벌어지는 타락의 참상을 탄식하자. 하지만 이 탄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 정체성을 선명하게 하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완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위한 맥락이 되게 하자.



지금은 소망 없이 절망할 때도 아니고 순진하게 낙관할 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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